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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전등화의 프랑스(1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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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8-18 11:07 조회5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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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전쟁을 치르기 전, 로샹보 백작 · 라파예트 후작, 그리고 니콜라 뤼크네르의 부대들은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와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의 부대로 재편되었다.[5] 뒤무리에는 남부 네덜란드의 침공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현지 주민은 프랑스군에 호응하여 황제의 지배에 대항하여 봉기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시기를 맞추지 못했으며, 혁명으로 프랑스군도 혼란했던 것이다. 장교들은 귀족 계급이기 때문에 혁명 정부에 비협조적이었고, 병사들의 규율도 풀어져 적 앞에서 도망가거나 혁명을 핑계 삼아 상관을 살해하는 등의 행위를 저질렀다.

마리 앙트와네트에 이르러서는 적들에게 프랑스군의 작전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고(1792년 7월 8일) 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4만2천명의 프로이센군, 2만9천명의 오스트리아, 6천명의 헤센 군대가 7월 19일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그들은 “국왕 부부에게 위해를 가하면, 파리를 괴멸시킬 것”이라는 언동으로 프랑스 시민을 격분시켰다. 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은 망명 귀족인 콩데 공작이 만든 왕정을 복고시켜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한다는 선언을 발표한다.첫 전투에서 뒤무리에 장군의 군대는 대패했고 프랑스 혁명 정부는 큰 위기에 처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7월 11일 입법 의회가 “조국이 위기에 빠졌습니다!”라는 선언을 발표했고, 선언에 따라 프랑스 각지에서 의용군이 파리에 집결했다. 이때 마르세이유에서 온 의용군이 노래하고 있던 군가가 퍼져, 이후 "라 마르세예즈"이라고 불렸다.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프랑스군의 열세의 원인은 전쟁에 비협조적인 국왕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8월 10일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왕권을 중지하고 국왕 일가를 떵플 탑에 유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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